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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남 창녕 영산 만년교 & 희생정신이 깃든 남산호국공원

만년교



창녕 영산면
흐르는 대로 걷기
만년교,남산호국공원
21.10.10

오늘 뜻하지 않게 오게 된 만년교에서
경남 창녕의 또 다른 정취에 빠지고 말았다.

드라이브 중 갑자기 발견하게 되었지만,
안 갔다면 후회할 뻔했던 만년교.

저 멀리서부터 풍기는 고즈넉한 풍경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창녕 영산 만년교 수리기 보물 제564호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창녕 영산 만년교 수리기

만년교는 정조 4년(1780)에 처음 축조되었고, 고종 29년 에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돌로 쌓은 다리는 개울의 돌과 흙 위에 자란 풀, 개울 주변의 숲, 물 위에 비친 반원 모양의 아치 구조 등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구조적으로 심하게 변형되어 현상대로 보존이 어렵다는
정밀 안전진단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만년교는 원형 복원과 구조적인 안전을 위해
전면적인 수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만년교를 해쳐해 본 결과 다리 측면의 내부에는 적심이 없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과정에서 불안정하게 쌓아
올린 강돌을 처음 축조 당시의 부재를 기준으로 가공 돌로 교체하였다.
이과정에서 새로 교체된 가공 돌의 이질감과 주변 경관의 변화로
보수 전후의 모습이 조금은 차이를 보인다.

창녕 영산 만년교 보물 제564호

아치형 모양의 만년교.
이런 아름다운 다리를 만나게 되다니..

인스타 갬성으로 사진 찍기도 좋았던 곳.
인생 샷 도전!

창녕 영산 만년교 보물 제564호

창녕 영산 만년교는 호국 공원 안에 있는 길이 13.5m, 너비 3m의 무지개다리이다.
하천 양쪽의 큰 바위 위에 화강석을 반달 모양으로 무지개처럼 쌓고 그위에 돌을 올린
다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만년교'는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라는 뜻인데, 다리 사이로
흐르는 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라고도 하며, 다리를 놓은 고을
원님의 공덕을 기르는 뜻에서 '원다리' 라고도 부른다.
정조 4년(1780)에 석공 백진기가 처음 다리를 만들었고, 고종 29년(1892)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다시 지었다. 다리 주변에는 '남천석교서병명' 이라고 쓴
비석과 '만년교' 라고 쓴 비석이 있는데, 두 비석 중 하나는 필력이 신통한 열세 살
신동이 쓴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년교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지닌 무지개다리로, 조선 후기 홍예교를 세운
방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영산 만년교 보물 제564호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

영산면사무소 남쪽의 호국공원 내에 있는 길이 13.5m, 너비 3m의 무지개다리이다.
개울 양쪽의 자연암반을 주춧돌로 삼아 홍예 라는 반원형 아치 모양의 구조를 걸쳤다.
홍예는 아래쪽이 위쪽보다 좁도록 다듬는 화강암을 반원형으로 쌓아,
다리의 무게가 옆으로 작용하게 한 구조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지개다리나 석빙고의 천장을 만드는 기술로 사용되었다.
홍예석의 위는 자연석으로 쌓았고, 다시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정조 4년 (1780)에 석공 백진기(白進己)가 가설하고, 고종 29년(1892)
4월에 영산 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 다시 지었다.
다리 옆에는 1780년에 세운 남천석교비가 있는데, 13세의 소년이
글씨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돌로 쌓은 다리는 개울의 돌들과 흙 위에 자란 풀, 개울 양쪽의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반원형의 곡선은 물 위에 걸린 무지개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영산면 마을

만년교를 지나 '남국호국공원' 산책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 보았다.
약간 오르막길이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영산면 마을.
시골마을이지만 주택들이 상당히 많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채 창녕 연지못 의 경취가
아름다운 영산면 마을.

영산지구 전적비

길 따라 무념무상으로 걷던 중 보게 된 전적비.

남산호국공원 내 산 우에 위치한 6.25전쟁 영산지구 전적비

전쟁 때문에 목숨을 바친 희생이 느껴지며..
뭔가 짠했다..

이 동상은 4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때의 뜨거운 눈물 그리고
전쟁의 아픔이 전달되는 듯했다.

영산지구 전적비 (1979년 4월 30일)

영산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지역 공격을 위하여 북한군이 막바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국군과 유엔군의 결사 방어로 남친이 저지된 격전지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남으로 침공을 계속하여, 8월 초에는
낙동강을 끼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 부대인 제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 지역에서
기습적으로 도하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8월 11일에는 이곳 영산지역까지 침공하였다.
이에 미 제24사단은 이들의 밀양지역 진출을 저지하기위해
증원 가능한 부대들을 이곳으로 집중시켜 공방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강서쪽으로 격퇴하고 방어진 지를 회복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빛날 중요한 진적지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산화한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고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교통부 주관으로국제관광공사가 집행을 맡고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1979년 4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전적비를 지나 다시 길 따라 올라갔더니
이런 푸르른 동산이 나왔다.

기대하지 못했던 정말 넓게 펼쳐져 있던 동산.
뭔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무도 없어서 이름 모를 새소리,
바람 소리 만이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가을치곤 햇살이 뜨거웠는데 여기 위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예쁜 주홍빛 열매가 달린 나무가 눈에 띄었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내 눈가에 갑자기 상큼함을 선물해 준 나무.

디테일이 살아있는 전적비.
공기 맑은 영산면에 늠름한 우리 국군..
그 영혼 영원하리.

계단 위에 뭐가 있을까?
올라가 보았다.

3.1 독립운동기념비

일제의 폭력적인 무단통치에 맞서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영산에도
애국지사 23인의 결사대가 일제의 조국 침략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영산지역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3일 이곳 남산봉에서 시작되어 영산면 일대와 창녕읍에
이르기까지 맨주먹으로 일본 경찰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쳐 영남
지방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를 부른 23인의 결사대를 추모하고, 그 공적을
기리가 위하여 1956년 3월 11일 연지(硯地) 옆의 로터리에 높이 4.6미터의
기념비를 건립하였다가 1980년 현 위치로 옮겼다. 매년 3.1절에는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23인 결사대>
구중회 김추은 장진수 하은호 박도문 임창수 박중훈 이기석 장전수
김두영 구남회 하영규 남용희 이수철 구판진 구판돈 서점수 김찬선
신암우 김금영 최봉용 권재수 조삼준

3.1독립운동기념비가 있는 남산봉에서
신선한 바람맞으며 휴식 중..
진짜 너무 좋네.

남산호국공원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임진왜란 호국충혼탑(가운데), 화왕산 승전도(왼쪽)

만년교 맞은편에 있던 임진왜란 호국충혼탑과 화왕산 승전도..
선열들의 애국심이 느껴졌다.

길가 개울 옆에 피어있던 개망초

만년교 사이에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가 바로 옆에 자그마하게 피어있던
앙증맞은 개망초 송이.

꽃 보기 힘든 하루였는데 이렇게라도
발견하게 되어서 작은 미소를 짓게 되었다.

영산면 길가에 있던 고양이

계획하고 온 것이 아니라서 더욱더 흥미진진했던
창녕 영산면 마을에 만년교와 남산호국공원.
아픈 과거를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더 들었던 계기였다.
&
지나가는 길에 보인 길냥이..
우리가 관심을 보이니까..
더 멀리 도망가던 경남 창녕 영산면 길냥이.
미안해...^^

오후 햇살이 깊어지며 원래 가려고 했던
함박산 공원으로 향했다.